젖은 갈대숲에 잠들면

 

강바닥을 핥고 노을은 더디게 흐른다

우리가 잠시 머뭇거릴동안 세상은 다소

흐리게 반응해왔지만 세삼 가난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쥐불 그을린 농로를 지나 먼지 자욱한

산모퉁이 길 내 발자국 남길 수 있다면

짙은 먹구름 뚫고 나온 빗살 머물게할 것이고

무심히 흐르는 시간 속으로

내 살아온 무지의 부끄러움도 슬프고

아름다운 형상으로 고이게할 것이다

쑥댓잎 나부끼는 강둑에 앉아 풀잎 위로

흘린 말들이

머물곳 없었던 유년 시절처럼

서늘한 산정을 떠돌다 젖은 갈대 숲에 잠들면

내가 사랑해왔던 사람보다 미워했던 사람곁에

뿌리내려 한 송이 꽃으로 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