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바’ 수사 대비 바닥까지 뚫어 증거인멸…굳이 왜?

총수 위기 때마다 삼성 조직적 대응…‘증거인멸 노하우’는?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이 2016년 9월 독일에서 최순실 씨를 만난 뒤 적은 메모 첫 번째 장

"검찰 수사 개시에는 우리는 자료 제출해야 함. 삼성 : 폭발적"

2016년 9월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은 독일에서 최순실 씨를 만납니다. 위 사진은 그때 호텔 메모지에 적어둔 내용입니다. 프랑크푸트르 호텔 이름이 선명합니다.

9월은 삼성이 최 씨 딸 정유라 씨에게 말을 사줬다는 의혹이 나오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삼성은 "말을 사주지도 않았고 최순실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입장을 냈습니다. 그 사이 박 사장은 최 씨를 만나러 독일로 날아갔습니다.

촉이 좋습니다. 실제로 '검찰 수사'도 '폭발'도 일어났습니다.

삼성은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을 차단하려고 애썼습니다. 그 흔적이 메모에 남았습니다. 다음 장을 보시죠.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이 2016년 9월 독일에서 최순실 씨를 만나 적은 메모 두 번째 장


먼저 '정보 소스 단속'

정유라 씨 말 문제를 제기하던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물론 정 씨 곁에서 말을 관리한 직원들, 최 씨가 운영하던 독일 호텔 직원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박 사장은 그 이름들을 구체적으로 적어뒀습니다.

그리고 '유라 SNS X'

정유라 씨가 SNS 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겁니다. 혹여나 말 사진이나, 삼성과의 관련성 등을 페이스북에서 자랑할까봐 막아야 한다는 거겠지요.

마지막은 '대체 말'

기존에 사준 말은 없애고 새로운 말로 '세탁'하자는 것. 메모에 쓴 대로, 이후 최순실 씨는 삼성이 사준 말을 처분합니다. 그리고 '대체 말'을 받아냅니다.

이 메모는 박 사장 혼자만의 끼적임이 아닙니다. 적은 대로 삼성 '윗선'에 대책 보고를 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한 특검팀은 이 메모를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뇌물공여·증거인멸 혐의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휴대전화를 버리거나 디지털 파일을 삭제하는, 흔히 뉴스에서 보는 '증거인멸'과는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무척 섬세한 작업, 어떻게 보면 국내 최고 대기업의 전략이라기엔 졸렬하기도 합니다.



"'삼성 : 폭발적'이라고 기재하였는데, 본건을 과거 이건희 회장이 기소되었던 삼성 비자금 사건과 유사하게 본 것인가요?"

당시 특검은 이 메모를 내밀면서 박 사장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메모가 압수된 줄 몰랐던 박 사장은 당황했습니다. "제 입장에서 그것까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여튼 공개될 경우 폭발적인 문제라는 생각에서 기재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재용 부회장 수사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 비자금'이 갑자기 튀어나온 이유가 뭘까요. 삼성이 이미 이건희 회장 비자금 문제뿐 아니라 이 비자금 자료를 폐기한 증거인멸로도 수사를 받아봤기 때문입니다.

2007년 10월 삼성 법무실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을 폭로합니다. 이건희 회장 비자금을 삼성증권 차명 계좌로 관리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폭로 2주 뒤, 공교롭게도 삼성증권 본사 간부가 각 지점에 이메일을 보냅니다.

제목 : <긴급. 엄명>. '계좌가 개설된 지 10년이 지난 계좌 개설 신청서는 폐기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메일을 보내고 바로 다음날, 검찰은 '삼성 비자금 특별수사본부'를 열었습니다. 이때도 삼성 '촉'은 남달랐던 겁니다.

금융감독원은 이 자료 폐기 문제를 '증권업 감독 규정' 위반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증거인멸 수사를 맡은 검찰은 무혐의로 결론 내렸습니다. 삼성증권이 "영업에 관한 중요서류 보존 연한을 10년으로 정한 상법에 따라 폐기했다"고 주장한 것을 받아들인 겁니다.

'삼성 폭발'을 막기 위해 발 빠르게 자료를 없애고 혐의도 비껴간 역사가 '이건희 시대'에는 가능했던 것이죠.

 

영화 ‘존 윅-리로드’에서 주인공이 과거를 묻어버리기 위해 바닥을 파는 장면. 삼성과는 무관합니다.


"바닥까지 가보자"

이번 삼성바이오로직스 수사 대비는 더 빨라졌습니다. 더 깊어졌습니다. 영화 같기도 합니다.

검찰이 바이오로직스 고의 분식회계 수사를 시작하기 하루 전도 아닌 반년 전인 지난해 4~5월부터, 삼성은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삼성은 바이오로직스 직원들의 노트북에서 '미전실' '합병' 'JY' 'VIP' 등 키워드를 검색하고, 이 단어가 나온 자료를 삭제했습니다. JY 는 이재용 부회장의 이니셜, VIP 는 보통 대통령을 부르는 말입니다.

이런 자료 삭제는 흔한 증거 인멸 방법이지요. 삼성 노하우는 남달랐습니다.

바이오로직스 공장 바닥 장판을 걷어내고 타일을 분리했습니다. 여기에 노트북 20여 대와 공용서버 1대를 묻었습니다. 자료를 아무리 지워도 컴퓨터 본체가 남아있으면 검찰이 '털어간다'는 건 알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삼성바이오에피스 임직원 30여 명의 휴대전화도 꼼꼼하게 처리했습니다. 업무 자료뿐 아니라 사생활도 인멸 대상이었습니다. SNS 나 이메일, 인터넷 검색 기록 그리고 삼성페이나 위치 동기화 등 사용자 동선이 노출될 수 있는 기능도 삭제했습니다.

이 작업은 삼성에 부메랑이 됐습니다. 검찰이 공장 바닥 속 노트북은 물론, 직원들이 집에 숨겨둔 자료까지 찾았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 사업지원 TF 백 모 상무, 보안선진화 TF 서 모 상무는 증거인멸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이 같은 증거인멸이 계열사 수뇌부가 참석한 '그룹 차원 회의'에서 결정됐다는 진술도 나왔습니다.

검찰과 언론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을 주의 깊게 보는 이유는, 이재용 부회장 '경영권 승계' 관련성 여부 때문입니다.

그룹 차원에서 바닥까지 뜯어야 했다면, 과거 사례를 볼 때 이번에도 '총수를 위해' 뭔가 감춰야 했던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검찰 수사가 증거 인멸부터 향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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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번에는 무엇을 숨기고 싶었을까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56&aid=00107045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