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감염된 동료와 접촉 줄여
먹이교환 과정의 감염확산을 막아
감염 벌은 다른 벌집에 위장 침투


동료와 먹이를 나누는 꿀벌들. 일리노이대 연구진은 벌의 등에 붙인 식별표를 이용해 바이러스에 감염된 벌은 이런 영양교환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꿀벌들이 바이러스 감염을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셈이다/미 일리노이대
인간보다 먼저 바이러스 감염을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한 존재가 있다. 인간처럼 복잡한 사회를 이루고 밀집 생활을 하는 꿀벌이다. 바이러스는 이런 꿀벌의 방역망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감염된 벌을 벌집에 침투시키는 ‘트로이 목마’ 전술을 펼친다. 냉전시대 미국과 구소련이 벌인 군비경쟁처럼 벌집 안에서 꿀벌과 바이러스의 물고 물리는 진화 경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미국 일리노이대의 곤충 생리학자인 애덤 돌리잘 교수 연구진은 국제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최신호에 “꿀벌 집단이 이스라엘 급성 마비 바이러스(IAPV)의 공격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행동 변화를 처음으로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감염된 벌과의 먹이교환 절반으로 줄어


꿀벌이 IAPV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날개를 떨다가 온몸이 마비되면서 죽는다. 꿀벌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벌집에 들어오면 군집 전체가 붕괴할 수 있다. 꿀벌들은 밀집생활을 하는 데다 수시로 배고픈 동료에게 먹이를 토해 전달하는 영양교환을 한다. 꿀벌 사회에선 바이러스 감염을 일으키는 밀접 접촉이 일상화된 셈이다.

연구진은 벌통 세 곳에 사는 꿀벌들의 행동을 카메라로 추적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벌통 한 곳 당 900마리씩 등에 식별기호를 붙였다. 이 중 90~150마리는 IAPV 바이러스에 감염시켰다. 5일 뒤 카메라가 1초에 한 번씩 찍은 사진들을 컴퓨터로 분석했더니 바이러스에 감염된 벌은 다른 벌보다 영양교환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벌과 일종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한 것이다.

감염된 벌이 게을러서 영양교환을 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벌들은 벌집에서 다른 벌보다 더 많이 돌아다니면서 영양교환을 해줄 동료를 찾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의 크리스티나 그로징거 교수는 사이언스지 인터뷰에서 “이번 발견은 실제 군집에서 꿀벌의 행동이 어떻게 감염을 억제하는지 보여준다”고 밝혔다.
 

바이러스가 꿀벌을 ‘트로이 목마’로 만들어

그렇다고 바이러스가 바로 두 손을 들지는 않았다. 앞서 과학자들은 IAPV 바이러스에 감염된 벌들이 집으로 가는 길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런 벌은 다른 벌집으로 가기 쉽다. 연구진은 바이러스가 다른 군집으로 퍼지기 위해 꿀벌의 행동을 조종한다고 추정했다.

꽃을 찾은 꿀벌.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집으로 가는 길을 잃고 다른 벌집을 찾는 경우가 많다. 바이러스는 이를 통해 다른 군집으로 퍼질 수 있다//미 일리노이대
문제는 벌집 입구를 지키는 경비 벌이다. 꿀벌은 몸에서 풍기는 식별 물질을 감지해 같은 군집의 동료가 아니면 벌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식별표를 붙인 벌들을 카메라로 추적한 결과, 경비 벌은 외부에서 온 건강한 벌은 15%만 통과시키는 데 비해 바이러스에 감염된 벌은 30%나 통과시켰다.

연구진은 바이러스가 꿀벌이 분비하는 유기물질을 변화시켜 경비 벌을 속인다고 추정했다. 실제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벌은 몸에 묻어 있는 유기물질이 달랐다. 바이러스가 화학적 신분증을 위조하는 것이다. 또 바이러스에 감염된 벌은 경비 벌에게 더 순종적이며 영양교환을 더 자주 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감염 벌이 살갑게 구는 행동에 경비 벌의 감시망도 느슨해졌다는 말이다.

그리스군은 목마에 숨어 트로이 성으로 들어가 밤중에 성문을 열었다. 바이러스는 감염된 꿀벌을 ‘트로이 목마’처럼 위장시켜 벌집에 침투시키고 결국 군집 전체로 퍼지는 것이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y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