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는 모습.(사진=윤창원 기자)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6일 현충일 추념사의 핵심은 "스스로를 보수라고 생각하든 진보라고 생각하든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상식의 선 안에서 애국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통합된 사회로 발전해갈 수 있을 것이다"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이어 통합의 한 예로 약산 김원봉의 광복군 합류를 인용했는데 정치권에서는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문 대통령이 언급하지도 않는 서훈 자격 시비가 벌어지고 있다.


서훈 자격에 대한 말이 오가다 보니 약산을 체포했던 친일경찰 노덕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행전안전부가 운영하는 '대한민국 상훈' 홈페이지를 보면 친일경찰 노덕술은 세 차례에 걸쳐 무공훈장은 받았다.

상훈기록에 의하면 노덕술은 1950년 12월 30일과 1951년 7월 8일 각각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1953년 2월 15일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상훈법에 따르면 무공훈장은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에서 전투에 참가해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한다.

무공훈장은 모두 5개의 등급으로 나뉘는데 노덕술이 받은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은 각각 3등급과 4등급에 해당한다.

1950년 군인이 됐던 노덕술은 한국전쟁 당시 헌병사령부 소속이었는데 어떤 전투에서 무슨 뚜렷한 무공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노덕술은 약산과 악연이 깊다.

친일경찰에서 반공경찰로 변신한 노덕술은 1947년 3월 22일 서울 청계천의 은신처에 있던 약산을 체포했다.

서울 중부경찰서에 구금돼 온갖 수모를 당한 약산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 놈들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이런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 있소"라고 의열단 동지인 유석현 선생 앞에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군복 차림의 약산 김원봉. 해방될 때까지 총과 폭탄을 놓지 않았다.(사진= KBS 다큐영상 캡처)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 선생의 며느리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살림을 책임졌던 정정화 선생은 회고록 '장강일기'에서 "언젠가 약산이 중부경찰서에 잡혀 들어가 왜정 때부터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몹시 분개했던 일이 기억난다. 사실 사상이야 어떻든지 간에 왜놈의 앞잡이가 임정의 요인을 모욕적으로 다루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모두 분개했던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고 밝혔다.

이처럼 해방 공간에서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 뿐 아니라 신변의 위협까지 느꼈던 약산은 월북을 선택했다.

약산은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남았다.

실제로 약산의 월북을 전후해 1945년 12월 30일 고하 송진우, 1947년 7월 19일 몽양 여운형,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가 암살되는 등 당시는 살인을 불사하는 정치테러가 횡행하던 때였다.

약산은 월북 뒤 북한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과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으나 1958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 유일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측되지만 자세한 경위는 알려진 바 없다.

'약산 김원봉 평전'을 펴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지난 2007년 북한 방문 당시 평양 애국열사릉을 찾았으나 "약산의 묘비조차 없었다"며 "북한에서는 존재 자체가 없어졌다"고 증언했다.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 단장, 조선의용대 대장, 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지내는 등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이 전설적인 애국자는 해방 뒤 북한에서는 존재가 삭제되고, 대한민국에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는 비운의 독립운동가로 남아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79&aid=0003235788


노덕술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