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강간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박모(20)씨에 대해 유죄 취지를 말하던 재판장이 “다만 이 판결의 집행을 유예한다”고 말했다. 그 순간 박씨와 방청석에 앉은 그의 친구들은 일제히 안도감에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10월 30일 서울고법 형사12부는 청소년 준강간으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박씨에 대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고 석방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반성하고 있으며 피해자 측에 상당한 합의금을 주고 용서를 빌어 피해자가 피고인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밝혔다. 1심에서 실형을 받은 박씨가 2심에서 풀려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재판부가 밝힌 '합의금'이다.

이 사건에 앞서 열린 강간사건 공판에선 예정된 선고가 미뤄졌다. 강간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받은 장모(25)씨는 항소심 재판부에 “합의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제가 해볼 수 있는 게 합의금밖에 없습니다”라고 호소했다.

재판장은 “피해자 측에서 용서해 주시겠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장씨는 “네, 1000만원으로 얘기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재판장은 “지난달 선고했어야 할 사건을 기다려줬는데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선고를 미뤘다. 

실형을 집유로 만들어주는 '합의'…피해자의 '자유' 선택일까 성범죄 재판에서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합의에 이르게 되면 형량을 대폭 줄여 주거나 “못해도 (징역) 2년은 깎아준다(한 피해자 변호사의 말)”. 피고인이 합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거나 합의에 거의 이르렀다고 하면 법원은 재판이나 선고를 한 달 정도 미뤄 준다. 이는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하는 피해자에게도, 형사처벌을 받게 되는 피고인의 방어권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 양형기준상 성범죄에서 피해자의 ‘처벌불원’이 있으면 이를 특별인자로 고려해 반드시 형을 깎아주도록 하고 있다. 그 취지는 “처벌불원이란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합의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피해에 대한 상당한 보상이 이루어졌으며, 피해자가 처벌불원의 법적ㆍ사회적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면서 이를 받아들여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를 의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실에서의 처벌불원은 이와 거리가 멀단 점이다. 우선 ‘진심으로 뉘우치기’는 “하는 경우도 없지만, 알 수도 없다”는 것이 7년째 비전담으로 피해자 변호를 맡아온 서혜진 변호사의 말이다. 법률구조공단에서 피해자 변호를 전담으로 하는 변주은 변호사는 “재판에 넘겨지기 전 수사과정에서 합의하려고 할 때 피해자의 마음을 ‘떠 보는’ 피의자들이 많다. 피해자가 합의 의사가 있다고 하면 범행을 인정하고, 의사가 없다고 하면 범행을 부인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런 경우 피해자 입장에서는 합의에 진실된 사과가 전제돼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반성은 멀고, 두려움은 가까웠다…피해자들의 복잡한 마음은

신진희 변호사(법률구조공단 피해자국선전담)는 “피해자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게 ‘변호사님, 가해자가 진짜 반성을 해요?’라고 물어보지만 사실 알 수 없다”면서 “법정에서 하는 말이나 반성문을 내는 것 등으로 미루어 반성하는 태도로 ‘보인다’고밖에 말해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결국, 가해자의 ‘진심’과 ‘진지함’은 ‘범행의 인정’으로 축소되는 경향을 보인다. “진정한 사과인지 여부는 피의자의 태도거든요. 부인하면 피해자로서는 자신이 거짓말한 게 되잖아요. 가해자가 스스로 잘못했다는 걸 인정한다면 피해자로서는 반성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겠지요.(변주은 변호사)”

‘그의 처벌이냐, 나의 배상이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피해자는 복잡한 마음을 갖는다. △합의를 안 해줄 경우 보복 걱정 △절차가 길어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 △가해자 또는 가해자 가족에 대한 동정 △처벌 가능성과 예상 형량에 대한 낮은 기대 △자신의 가족들로부터 합의 종용 △현실적으로 치료 등 금전이 필요한 상황 등이 영향을 미쳐 합의를 결심하기도 한다. 이는 ‘처벌불원의 법적ㆍ사회적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엄벌이냐 합의냐…"고민 뒤 선택, 누구도 비난해선 안 돼"

어떤 피해자에겐 엄벌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성폭력피해자 사례분석을 통한 지원체계 개선방안 연구'에 따르면 "가해자에 대한 유죄판결은 피해자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피해자의 심리 회복에도 큰 역할을 한다". 이 보고서에는 가해자가 형사처벌을 받았을 때 피해자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사례자의 말도 인용돼 있다. "사람들의 위로도 필요해요. 근데 위로일 뿐이에요. 객관적인 게 필요했던 거예요." "드디어 내 말을 믿어주겠구나. 아무리 피해자라 해도 지금까지 사람들의 시선들…. 징역 살게 되면 걔가 나쁜 놈이라는 게 밝혀지니까."

또 어떤 피해자에겐 합의가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한 성범죄재판전담 판사는 "법이 성범죄를 처벌하는 이유는 피해자의 개인적 법익이 침해됐기 때문인데, 그 개인적 피해를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피해자는 고통에 대해 부족하지만 정당한 배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서혜진 변호사는 "가해자와 합의해 충분한 금액을 받고 일상으로 돌아간 피해자들을 많이 봤다"면서 "시간과 비용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해봤을 때 이 정도 금액 받고 합의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 합의할 수 있어야 하고 그걸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합의 안 해줬다고 보복하면 어떡하지"

-"피고인이 형을 살고 나와 '왜 합의 안 해줬느냐'며 찾아와 괴롭힐까봐 두려움 때문에 합의를 하는 분도 계세요."(신진희 변호사)

-"피해자 10명 중 9명이 합의를 해주고 1명이 안 해준다고 하면 가해자가 보복 감정이 생길 수 있죠. 직장을 알거나 집을 아는 경우도 그런 이유로 합의를 많이 해주는 편입니다."(서혜진 변호사)
-"피해자의 사생활과 안전에 대한 보호가 제대로 이뤄지지않는 소송절차에 대한 불신과, 처벌받은 가해자가 보복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자신의 필요와 관계없이 피해를 회피하고 사건을 덮기 위해 합의를 선택하기도 한다."(성폭력 ‘형사합의’에 관한 페미니즘 법학적 경험 연구, 장다혜 박사)

▶"진절머리 난다…이제 그만하고 피하고 싶어"
-"진심으로 용서한다기보다, 대부분은 이 사건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예요."(서혜진 변호사)
-"많은 피해자들이 '신고는 했는데, 이렇게 절차가 길어질 줄 몰랐다'고 해요. 평생 처음 겪는 일이니까요. 수사관들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수사한다고 하는데 피해자 입장에서는 취조한다고 느껴져 위축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절차를 빨리 끝내고 싶어 하거든요."(변주은 변호사)
-"우리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를 보는 시각엔 여전히 '정조관념'이 들어 있어요.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가지고 싸우기가 쉽지 않고, 절차가 길어지면 피해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빨리 끝내길 원하는 경우들이 있죠."(장다혜 박사)

▶"내가 타인의 인생을 망치는 것 아닐까"
-"가해자 쪽에서 합의를 읍소하면 피해자는 '내가 이 사람 인생을 망쳐도 되나' '가해자 가족들은 불쌍한데'라는 생각이 들어요. 많은 피해자들이 자신이 피해를 입어 가해자가 처벌되는 당연한 일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것처럼 여기는 감정을 가지죠."(변주은 변호사)
-"가해자가 한부모 가족이어서 실형이 선고될 경우 가해자의 아들을 돌볼 사람이 없는 준강간 사건에서 피해자는 합의를 결정했다. 가해자가 결혼을 앞둔 임신한 약혼자를 둔 사례에서 피해자는 '가해자의 약혼자가 강간치상 사실을 알게되면 상처받을지 않을까? 나만 참으면 셋(가해자,애인,아이)이 행복해지는 것 아닌가?'를 고민했다." (성폭력 ‘형사합의’에 관한 페미니즘 법학적 경험 연구, 장다혜 박사)

▶"합의 안 한다고 제대로 처벌받을 것 같지도 않은데"
-"절차 진행하다가 증명이 애매한 경우, 확실한 증거가 없는 경우, 불기소가 예상되는 경우라면 저도 조심스럽게 피해자에게 합의를 제안합니다."(서혜진 변호사)
-"자신이 생각했을 땐 큰 피해인데, '이런 경우 초범이고 동종 전과 없으면 집행유예나 벌금형 나온다'고 알려 드리면 '어차피 감옥에도 못 가는데' 하면서 합의할 때도 있어요."(변주은 변호사)
-"차라리 합의금이라도 받는 것이 피해자에겐 해결방법이 될 수 있다. 피해회복이라는 의미라기보다 가해자의 사실인정가 반성의 결과로서 혹은 가해자에게 금전적 부담을 지움으로써 일종의 처벌적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성폭력 ‘형사합의’에 관한 페미니즘 법학적 경험 연구, 장다혜 박사)

▶"부모님이 자꾸 합의하라고 하는데…"
-"피해자 부모님 중에서 빨리 합의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분이 있어요. 의외로 자신의 딸의 피해 못지않게 가해자의 인생을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저 아이가 형을 살아야 하고, 전과는 평생 남을텐데, 저 아이의 인생에 연루됐다는 게 싫다. 빨리 합의하자'면서 가족들이 오히려 지지해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죠."(서혜진 변호사)
-"청소년 피해자의 경우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데, 피해자 부모가 가해자 부모의 입장을 헤아리려 할 때가 있어요. 가해자 부모로선 '같이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라며 읍소하고, 피해자 부모 입장에서도 이 일이 알려지기 두려운 거죠."(변주은 변호사)

▶"치료비 등 돈은 필요한데, 민사소송은 좀…"
-"성폭력 피해자 1인당 평균 의료비 지원액은 2010년 기준 14만 2080원이다." (여성가족부 자료)
-"성폭력 피해자가 주로 10대에서 20대의 젊은 여성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신과 치료 등으로 발생하는 고비용을 스스로 감당하는 데에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성폭력사실에 대해 부모님 등 가족에게 숨기는 경우 비용 부담으로 인해 피해자는 형사합의를 통한 피해보상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다."(성폭력 ‘형사합의’에 관한 페미니즘 법학적 경험 연구, 장다혜 박사)
-"민사소송을 하게 되면 이름, 주민번호, 주소 등 개인정보를 공개해야 해요. 그런 정보가 알려지는 것이 두려우면 형사소송에서 합의하는 것이 간편한 방법이죠."(신진희 변호사)

▶"사람들이 꽃뱀이라고 손가락질하면 어떡하지"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여기서 합의하면 꽃뱀으로 몰리지 않을까?''돈 바라고 신고한 걸로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해요. 우리 사회는 피해자에 대한 '완전무결함'을 강요하면서 돈을 받으면 피해의 순수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피해자들도 이 사회의 구성원인데 그런 통념에서 어떻게 자유롭겠어요."(서혜진 변호사)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돈을 주고 거래하는 나쁜 여자로 낙인 찍힐 우려 때문에 합의금 액수를 결정하는 데에 고민을 하게 되기도 한다. (...) 실제로 많은 피해자들이 합의 후 합의금에 대해 자신의 성폭력합의 후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금전과 교환했다는 생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 피해를 금전과 교환했다는 생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다."(장다혜 박사)